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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 2 장 과학과 성경 (2006.05.29-10:36:10) Modify Delete
 848 - 번째 접속

제 2 장
과학과 성경

“이것들 증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욥 12:9)

천연계라는 책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둘 다 같은 창조주의 마음을 담고 있으므로 서로 일치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방법들과 다른 언어들을 가지고 동일한 큰 진리들을 증거한다.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경이적인 것들을 발견하고 있다. 과학의 탐구로 발견되는 것은 그것이 바르게 이해되는 한 거룩한 계시인 성경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천연계의 책과 성경은 서로 빛을 비추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일하시는 법칙들을 우리에게 다소 가르침으로 그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천연계에서 관찰되는 여러 가지 사실들에서 잘못 끌어낸 주론들은 과학과 성경이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케 하였다. 또 이 둘의 조화를 도모하는 중에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훼손하고 파괴시키는 성경 해석 방법이 받아들여져 왔다. 창조에 관한 모세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 것과 지질학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지질학은 지구가 혼돈된 상태로부터 진화하는 데 수백만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주장한다. 이 과학의 상상적인 가설에 성경의 사실을 맞추기 위해, 창조의 기간은 수천 년 또는 수백만 년이라는 실로 어마어마하고 막연한 기간이 있었다고 추정되었다.

이런 결론은 전혀 부당한 것이다. 성경의 기록은 그 자체와 천연계의 가르침에 일치되는 것이다. 창조에 사용된 첫째 날에 대하여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창조 주간의 제 6일까지 각각 말해졌다. 이 기간 중의 하루도 오늘날과 같이 아침 저녁이 있는 하루였다는 사실이 영감 된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창조 사업 자체에 대해서는 하늘로부터 온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라는 증언이 있다. 이처럼 무수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하나님에게 있어서 땅을 혼돈한 상태로부터 진화케 하는데 과연 얼마의 세월이 필요하였겠는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왜곡해야만 할까?
땅 속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고대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사람과 동물과 식물이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 유물들은 모세의 기록 이전 시대에 동물과 식물이 생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이런 것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주고 있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식물과 동물의 생장이 후대의 것보다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었다. 훙수 때에 지구의 표면은 파괴되어 현저한 변화가 생겼다. 지각이 다시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시대 이전에 생존하였던 동식물이 화석으로 많이 보존되었다. 광대한 삼림은 홍수 때에 땅 속에 파묻혔다가 후에 석탄으로 변하여 광대한 석탄층을 형성하였고, 석유의 공급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 편리와 안락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을 무언 중에 입증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창조 사업의 최고의 영광인 사람을 미생물에서 연체 동물, 연체 동물에서 다시 사족 동물로 진화된 것으로 보는 것은 지구의 진화에 관한 학설과 유사한 것이다.

사람에게 부여된 연구의 기회를 고려해 보라. 사람의 생명은 얼마나 짧은지를, 사람의 활동 범위는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를, 사람의 시야는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지를, 사람이 내린 결론, 특히 성경 역사 이전으로 간주되어지는 사건들에 대하여 사람이 내린 결론은 얼마나 자주, 얼마나 큰 과오를 반복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과학의 가정적 추론은 얼마나 자주 정정되며 폐기되고 있는지를, 지구의 발달에 관한 가정적 연수가 얼마나 흔히 또 간단히 몇 백만 년씩 가감되는지를, 다른 여러 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학설들이 얼마나 서로 모순되고 있는지를,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보고서도, 우리의 혈통을 미생물, 연체 동물, 원숭이로 추적해 갈 수 있는 “특권”을 인하여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창 1:27)니라는 단순하고 장엄하게 선언된 성경의 말씀을 내어 버리는 데 우리가 동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왕의 궁정에 소중히 보관된, 어떤 족보보다도 더욱 영광스런 족보, 곧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 3:38)는 족보를 거부할 수 있을까?

과학이 밝혀 낸 사실들과 인생의 경험은, 그것이 바르게 이해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천연계 가운데서 끊임없이 활동하신다는 성경의 증언과 일치한다.

느헤미야가 기록한 찬미에서 레위 사람은 노래하기를,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라고 하였다.

이 지구에 관하여 성경은 창조 사업이 완결되었다고 말한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히 4:3).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지금도 당신께서 지으신 만물을 붙드는 일을 하고 있다. 맥박이 뛰고 호흡이 계속되는 것은, 한 번 움직이게 한 기계 조직이 그 고유의 힘에 의하여 활동을 계속하기 때문이 아니다. 호흡 하나하나, 심장의 고동 하나하나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한 증거이다. 가장 작은 곤충으로부터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은 날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 …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 104:27-30).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
빚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욥 26:7-10).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떨며 놀라느니라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뢰야 누가 능히 측랑하랴”
(욥 26:11-14).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나 1:3).

온 천연계를 통하여 작용하며 만물을 유지하는 위대한 힘은, 일부의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갓 보편적인 원칙이나 일종의 가동시키는 에너지가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개체를 가지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개체를 가지신 분으로서, 자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히 1:3)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구주로서 사람의 모양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사람의 모양을 가진 구주로서 승천하셨다. 그분은 사람의 모양을 가진 구주 그대로 하늘 궁정에서 중보하신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인자 같은 이가”(단 7:13) 우리를 위하여 봉사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하는 중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 17)고 밝히 말하였다. 모든 세계를 공간에 달려 있게 하고, 우주 만물을 질서정연하게, 그리고 지치지 않고 활동하도록 붙드는 손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손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다.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시 11:4)으되, 하나님께서는 그 영으로서 도처에 두루 계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것을 자세히 아시고, 하나하나에 친히 관심을 가지신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5, 6)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7, 8; 욥 26:6 참고).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 139:9, 10).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시 139:2-6).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 신기하게 들어맞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공급이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하신 분은 곧 만물의 창조주이셨다. 물질 세계에 있어서, 마음에 심기워진 모든 갈망이 충족되도록 준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는 능력과 사랑하는 능력을 갖도록 사람의 심령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심령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지 않은 채 버려두는 분이 아니시다. 이 세상에서 죄와 슬픔과 괴로움으로 고생할 때, 실체가 없는 원칙이나, 개성이 없는 실체, 혹은 한갖 추상적 개념들로는 사람의 필요와 열망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동정심도 없고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을 들을 수도 없는 법칙이나 힘, 사물들을 신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붙들어 주실 전능한 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영원하신 친구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분의 따뜻한 손을 붙잡고 사랑으로 가득한 그분의 마음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셨다.

삼라 만상의 신비를 깊이 연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무지와 연약함을 가장 크게 인식할 것이다. 그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와 높이, 벗길 수 없는 비밀, 아직 들어가 본 일이 없는 광대한 진리의 분야가 자기 앞에 전개되어 있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뉴튼처럼 그도 “나는 내 미지의 진리의 대양을 앞에 두고 바닷가에서 조약돌과 조개 껍질을 줍고 있었던 아이처럼 느껴진다”고 기꺼이 말할 것이다.

과학을 가장 깊이 연구한 사람들도 천연계 가운데 무한한 능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만으로 볼 때, 천연계의 가르침은 다만 모순과 실망을 줄 뿐이다. 오직 성경의 빛에 비추어 볼 때에야 비로소, 이를 바로 해석할 수 있다. “믿음으로 … 우리가 아나니”(히 11:3).

“태초에 하나님이”(창 1:1). 열정적인 탐구심을 가진 사람은 방주로 날아간 비둘기처럼, 이 구절로 돌아감으로써만 쉼을 찾을 수 있다. 한없는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위에나 아래나 너머에나 두루 계시면서 만물들이 “선을 기뻐함”(살후 1:11)을 이루도록 일하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그러나, 그 만물의 증언은 오직 거룩한 교사의 도움을 받음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태초에 수면에 운행하신 하나님의 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말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신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음으로써만 과학의 증언은 올바로 해석될 수 있다. 가장 심오한 진리들은 이런 인도를 받음으로써만 깨달을 수 있다.

전지하신 하나님의 지도 아래서만, 우리는 그분께서 만드신 것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그분의 의사에 일치된 생각을 가질 수가 있다.
”-교육, 12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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